밀라노 디자인위크 2024에서 만나는 지속 가능한 디자인

박지일·1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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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디자인위크 2024에서 만나는 지속 가능한 디자인

지속 가능성, 디자인의 새로운 전제

박지일

나이스워크숍 전시 포스터


전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가구 박람회 ‘밀라노 디자인위크 2024’가 지난 4월 21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올해로 62주년을 맞이하는 밀라노 디자인위크는 건축, 패션, 자동차, IT 등 다양한 분야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리다. 이번 디자인위크의 주제는 ‘Materia(물질) Natura(자연)’다. 동시대 디자인의 역할과 과제를 창의적인 해법으로 풀어나가는 여러 브랜드와 창작자의 제안에서 ‘환경’과 ‘지속가능성’은 더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더욱이 국제 비엔날레나 디자인위크처럼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개최하는 행사는 탄소배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더해지면서, 환경적 측면이 더욱 강조되는 추세다. 중요한 건 디자인의 환경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여러 해를 거듭해 진행된 만큼,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범용성을 갖춘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밀라노 디자인위크 2024에서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가 선보인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만나보자.


포르마판타스마의 얼틱 랩


재료와 생산 방식을 탐구하는 파빌리온

가구 산업은 규모와 범위 면에서 환경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디자인위크 기간 동안 이탈리아의 디자인 스튜디오 포르마판타스마(Formafantasma)가 스페인의 자재 기업 코센티노(Cosentino)를 위해 디자인한 설치물 얼틱 랩(Earthic Lab)은 산업 디자인에서 재활용과 재사용의 역할에 주목해, 디자인위크에 방문한 이들에게 지속 가능성에 중점을 둔 생산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밀라노의 역사적인 장소인 지롤라모 극장 안에 놓인 이 설치물은 제품을 구성하는 요소를 해체해 재료의 기원과 특성을 탐구하고, 각 재료의 생산 과정을 이해하도록 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극장 안에서는 코센티노가 재활용해 개발하는 재료 프로젝트 어틱 캡슐 컬렉션이 전개되는 과정과, 실제 그 재료를 활용한 조각 작품, 그리고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재료와 생산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었다.


스튜디오 디젝의 Flaxwood


전통적 소재의 지속 가능성

천연자원을 건축 자재로 개발하는 런던의 스튜디오 디젝(Dzek)은 재료를 탐구하는 디자이너이자 연구자인 크리스티앙 마인더츠마(Christien Meindertsma)와 협력해 아마씨유에서 추출한 천연 건축 타일인 ‘Flaxwood’를 선보였다. 이들은 시트 모양으로 된 실내 바닥에 까는 재료인 ‘리놀륨’의 역사와 기원을 추적한다. 최초의 리놀륨은 생분해성 재료인 아마씨유, 코르크 가루, 나무 가루와 같은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착안해 전통적 소재가 현대의 지속 가능한 표준을 충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론드 스튜디오의 작품


한편 흙을 사용해 독특한 표면을 가진 가구와 오브제를 디자인하는 그론드 스튜디오(Grond Studio)는 바란자테 아틀리에에서 흙으로 만든 일련의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원시적 재료인 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적음을 시사했다. 그론드 스튜디오는 새로운 재료 지식과 현대 미학을 결합해 다진 흙과 점토 석고 등을 활용한 작품을 제작하는데, 그 과정에는 지역 토착적인 건축 기법이 수반된다. 이들은 재료의 특성과 그 제작 방식에 기반을 둬,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자원 중 하나인 흙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 잡힌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알루미늄을 활용한 업사이클링 디자인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오현석의 스튜디오 나이스워크숍은 콘크리트 타설에 사용하는 알루미늄 거푸집(AL-FORM)을 재활용한 가구를 선보였다. 꼬르소 꼬모10의 캡슐 쇼케이스에서 선보인 이 알루미늄 양식 시리즈는 알루미늄 슬래브로 만든 의자와 벤치, 테이블을 아우른다. 건설 현장에서 사용되는 알루미늄 거푸집이 생산-렌탈-수리-해체-재생산의 주기를 갖는 데 착안해 새로운 쓰임을 고안했다. 알루미늄 거푸집은 쇼트 블라스트와 평탄화 과정을 통해 표면의 콘크리트 잔해를 제거한 후 재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재사용된 거푸집의 표면에 구체적인 질감이 형성되고, 반복 작업으로 콘크리트의 흔적은 어두워진다고 한다. 나이스워크숍은 한국의 알루미늄 가설재 전문 기업인 성지알펙스의 업사이클링 브랜드 ‘포맷(FORMAT)’과 협업해 두 개의 컬렉션을 제안했다. 수리 과정을 거친 후에도 표면에 콘크리트의 견고한 질감이 남아 있는 거푸집을 활용한 ‘에이지드 폼 라인’과 재활용을 통해 재생산된 거푸집을 사용한 ‘뉴폼 라인’이다. 전자는 가구의 표면에 약간의 결함을 지닌 채 더 어두운 색상을 띠고, 후자는 윤기나는 색상과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다. 두 가지 재료로 만든 의자와 벤치, 테이블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디자인으로 구성됐다. 특징적인 것은 기존 거푸집의 리벳 구멍을 가구 사이의 연결점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알루미늄 공정의 순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이 가구는, 실제 거푸집의 형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가구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한다. 


하이드로 전시 전경


재활용 알루미늄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시도는 ‘100R’이라는 전시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노르웨이의 알루미늄 및 재생에너지 회사인 하이드로(Hydro)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곱 명의 디자이너에게 자사의 기술로 재활용한 알루미늄 ‘하이드로 써컬 100R(Hydro CIRCAL 100R)’로 가구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알루미늄은 생산 방법에 따라 탄소배출량이 달라지는데, 화석 연료로 만드는 일반적인 알루미늄이 kg당 평균 2.3kg의 이산화탄소를 보유하고 있다면 재활용 알루미늄으로 만든 하이드로 써컬은 1.9kg으로 탄소발자국이 적은 편이다. 오래된 창틀이나 중고 자동차 부품 등으로 사용되던 알루미늄 스크랩을 재활용해 만든 하이드로 써컬은 룩셈부르크, 스페인, 영국, 미국 등지의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실제 유럽 건축 및 건설 시장에 공급되고 있다. 하이드로 측은 “디자이너와 협력함으로써 더 많은 제조 업체들이 지속 가능성을 기반으로 재료를 선택하는 방법을 이해하도록 유도해, 업계 전체가 친환경을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길 원했다”고 전했다. 일곱 명의 디자이너는 각각 의자, 조명, 옷걸이, 선반, 컨테이너 등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전시장에 놓인 오브제들은, 업사이클링 디자인임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완성도 높은 미감을 갖췄다. 지속 가능한 디자인은 지속 가능한 기술과 협업할 때 한층 더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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